221, 국제시장 담방기
[문양일 기자] 부산에 내린 우곤이와 나는 우선 신창동에 자리 잡고 있는 국제시장을 찿았다. 삼천포에서 포목 장사를 하는 우곤이 네 점포에 포목을 대여주는 도매상이 이 시장에 있기 때문이다.
부산 국제시장은 일본 감정기 때 주로 일본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철수 하면서 전쟁 물자나 가지고 가기 불편한 물건들를 현금으로 바뀌기 위해 이곳 공터에 내다 팔았던 것이고, 또 나라가 해방이 되면서 외국에서 살던 교포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반발하면서 자유를 찿아 남하 한 피난민들이 이곳에 몰려 들어 와서 장사를 하면서 시장은 활성화 되였고 또 시장 이름도 “자유 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미군 부대에서 흘려나오는 피복.깡통 식품, 과자,담배 등을 팔기도하고,일본에서 들어 오는 밀수품들를 내어 놓고 팔기도 하면서 아곳애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한때 5만명이나 되기도 하였다.
그 무렵 부산에는 부산역전 화재,광복동 백화점 화재,국제호텔 화제 등 대행 화재가 잇따라 발생하고 하였는데
1950년 12월과 국제시장에도 대행 화재가 발생 하였다.
그러다 1953년 1월에는 국제시장에서 엄청나게 큰 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불길은 1.5km 나 번지고 피해액이 무려 1400여억원에 달하고 널판지 가게가 4260채나 불타없어지게 된다. 당시 국제시장은 시장다운 시장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심장부였던 탓에 우리나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기도 한다.
그 후 시장 상인들의 눈물 겨운 복구가 시작 되었고, 부산시에서도 590억이란 거금을 들어 시장 재건에 지원한다.
그러길 3년 뒤 1956년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시장이 다시 대행 화재가 발생하여 국제시장을 황폐케하고 상인들를 괴롭혔다.
나는 그 전에 국제시장에서 큰 불이 잇따라 난 것을 신문에서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불난 흔적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찿아 볼 수 없었다.
복잡하게 늘어 서 있는 상점들 발디딜 틈도 없는 사람들, 비좁은 길를 짐을 실고 빠져 다니는 오토바이들...
국제시장은 그때만 해도 미군의 군용 물자와 일본의 밀수입 물품이 쏟아져 들어 와 공인 된 불법의 온상지였고 또 소매치기들이 들꿇었고, 대지는 국가소유이기 때문에 시청과 상인들 간에 마찰도 끄치질 않아 말 그대로 도떼기 시장이였다.
그러다 1965년에 정부가 시장의 대지를 상인들에게 불하하기로 약속을 하고 또 1981년 목조 건물 3동을 제외 한 철근 콘그리트로 개조 된 9개 동 2,177평이 불하가 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별로 등기 돤다. 또 1969년 1월에 국제시장 번영회가 설립되어 상공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1977년에 정식으로 시장이 허가 받게 된다.
아직 허가가 나오기 전 나는 우곤이를 따라 국제시장으로 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곤이는 넓은 시장을 몇 번 두리번 거리다가 목적지 포목 도매상을 찿았다. 포목상 두 내외는 우곤이가 온다는 기별를 받고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 서자 반갑게 마지한다. 그리고 우곤이가 나를 소개하자 두 분은 반가운 기색을 나에게로 돌리신다.
삼천포에서 나올 적에는 동틀 무렵이였는데, 벌써 정오를 지나고 있으니 내 배 속은 비여 있다는 신호가 자꾸만 보내곤 한다. 포목점 여주인은 우리가 오면 대접하기 위해 적은 솥에다 전기 곤로에 얹어놓고 밥을 지어 놓고 계셨다.